수원 화성은 어떻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을까? 『화성성역의궤』가 만든 복원의 진정성, 18세기 과학 기술의 집약, 정조의 효심과 이상 도시 계획까지, 수원 화성의 숨겨진 가치를 심층 탐구합니다.
파괴와 재건, 그리고 세계가 인정한 ‘기록의 힘’ – 수원 화성의 위대한 역설
화성성역의궤.수원 화성을 마주하면 누구나 그 견고한 아름다움과 빈틈없는 완벽함에 감탄하게 됩니다. 유려하게 흐르는 성곽의 능선, 위풍당당하게 솟은 장안문과 팔달문, 그리고 곳곳에 자리한 독창적인 방어 시설들은 20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줍니다. 많은 이들이 수원 화성을 조선 시대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존된 완전무결한 유산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역설적인 진실이 숨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수원 화성은 축성 당시의 원형 그대로가 아닙니다. 화성은 일제강점기의 의도적인 훼손과 방치를 견뎌내야 했고, 한국전쟁의 포화 속에서 성벽과 주요 문루가 처참히 파괴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화성행궁은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고 , 미군의 폭격과 시가전으로 화성의 정문인 장안문과 동문인 창룡문의 문루는 크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질문은 명확해집니다. 이처럼 심각하게 파괴되었다가 ‘복원’된 유산이 어떻게 전 세계가 그 가치를 인정하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을까요?. 복원된 문화재에 대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유네스코의 기준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의 열쇠는 바로 돌과 나무가 아닌, 종이 위에 남겨진 위대한 ‘기록’에 있었습니다. 수원 화성의 이야기는 단순한 건축의 역사가 아니라, 파괴의 비극을 기록의 힘으로 극복하고 다시 태어난 불멸의 서사입니다.

복원의 기적을 가능케 한 ‘화성성역의궤’: 진정성의 증거
역사적 배경: 두 번의 암흑기와 무너진 성곽
18세기 말, 정조의 원대한 꿈과 당대 최고의 기술로 탄생한 수원 화성은 19세기까지 그 위용을 지켜왔습니다. 그러나 국운이 기울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화성은 두 차례의 큰 시련을 맞이합니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자긍심이 깃든 화성은 의도적으로 방치되고 훼손되었습니다. 성곽 주변으로 도시가 무분별하게 확장되며 성벽 일부가 헐려 나갔고, 행궁과 같은 주요 시설물은 그 기능을 잃고 다른 용도로 전용되거나 철거되었습니다.
결정적인 파괴는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이었습니다. 수원이 전략적 요충지가 되면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화성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특히 장안문과 창룡문의 문루는 폭격으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았고, 견고했던 성곽 곳곳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전쟁의 상흔은 너무나 깊어 1960년대까지도 화성은 제대로 된 복원 계획 없이 방치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화성성역의궤』의 발견과 가치: 추측을 과학으로 바꾼 기록
1975년, 마침내 수원 화성에 대한 대대적인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파괴된 부분을 어떻게 원래 모습 그대로 되살릴 수 있을까요? 사진 자료조차 거의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복원은 자칫 상상과 추측에 의존한 ‘재현’에 그칠 위험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절체절명의 순간, 기적처럼 나타난 것이 바로 1801년(순조 1년)에 편찬된 공사 보고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였습니다.
『화성성역의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상세한 공사 보고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책에는 화성 축성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과정이 경이로울 정도로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설계와 공법: 성곽 전체와 각 시설물의 모습을 그린 상세한 설계도(圖說)는 물론, 어떤 공법으로 돌을 쌓고 벽돌을 구웠는지에 대한 설명이 담겨 있습니다.
- 재료 목록: 공사에 사용된 돌, 나무, 벽돌, 기와부터 대못 하나의 종류와 개수까지 모든 자재의 규격, 수량, 단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 인력 관리: 공사를 총괄한 관료부터 석수 642명, 목수 335명 등 각 분야 장인의 이름과 근무 일수, 그리고 이들에게 지급된 품삯(급여) 내역까지 명시되어 있습니다.
- 예산 집행: 총 공사 비용과 재원 조달 방법, 지출 내역이 투명하게 정리되어 있어 당시의 경제 상황까지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완벽한 기록 덕분에 복원 공사는 ‘추측’이 아닌 ‘과학적 고증’에 기반한 ‘원형 그대로의 복원’이 가능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전쟁 이후 내부 구조를 알 수 있는 사진이나 도면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 복원이 난감했던 동북공심돈의 경우, 『화성성역의궤』에만 유일하게 그려진 내부 단면도(裏圖) 덕분에 그 독특한 나선형 계단을 완벽하게 복원해낼 수 있었습니다. 『화성성역의궤』는 말 그대로 문화재 복원의 교과서가 된 것입니다.

유네스코가 인정한 ‘복원의 진정성(Authenticity)’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의 가장 중요한 기준 중 하나는 바로 ‘진정성(Authenticity)’입니다. 이는 유산이 본래의 형태와 디자인, 재료와 기술을 얼마나 잘 보존하고 있는지를 의미합니다. 이런 이유로 대대적으로 복원된 유산은 진정성을 인정받기 매우 어렵습니다. 1997년 등재 심사 당시, 수원 화성 역시 파괴 후 복원되었다는 점 때문에 등재가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화성성역의궤』의 존재가 이 모든 우려를 불식시켰습니다. 심사단은 비록 성곽의 일부가 현대에 복원되었지만, 그 복원이 200년 전의 설계도와 공사 기록에 따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감탄했습니다.
물리적인 연속성은 전쟁으로 인해 일부 끊겼을지 몰라도, 설계와 공법, 재료,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정신의 연속성은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완벽하게 증명되었습니다. 즉, 수원 화성은 ‘기록으로 증명된 진정성’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세계유산의 자격을 획득한 것입니다.
이는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수 있었던 가장 핵심적인 이유이며, 훗날 『화성성역의궤』 자체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2007년) 계기가 되었습니다.
동서양 건축 기술의 집대성: 18세기 과학 혁명의 현장
수원 화성은 단순한 방어용 성곽이 아닙니다. 이곳은 18세기 조선의 과학 기술이 총 집약된 거대한 실험장이자 혁신의 현장이었습니다. 정조와 당대 최고의 실학자들은 성리학의 관념적 틀에서 벗어나 백성의 삶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학문, 즉 실학(實學) 사상을 바탕으로 화성을 건설했습니다.
실학 사상과 정약용의 설계
화성 설계의 중심에는 젊은 천재 학자 다산 정약용이 있었습니다. 정조의 명을 받은 그는 동서고금의 기술 서적과 병법서를 깊이 연구하여 가장 효율적이고 견고하며 실용적인 성곽을 구상했습니다. 특히 청나라를 통해 전해진 서양의 과학 기술 서적을 적극적으로 참고하여 조선의 전통 축성술과 서양의 과학 이론을 절묘하게 융합시켰습니다. 그 결과, 화성은 이전의 어떤 성곽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구조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첨단 기술과 장비
화성 축성 과정에서 가장 빛나는 성과는 바로 새로운 과학 기기들의 발명과 활용이었습니다. 이 기기들은 공사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비용을 절감했을 뿐만 아니라, 공사에 동원된 백성들의 고된 노동을 덜어주려는 정조의 애민정신이 반영된 결과물이었습니다.
- 거중기(擧重機)와 녹로(轆轤): 화성 축성의 상징과도 같은 거중기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작은 힘으로 수 톤에 달하는 무거운 돌을 들어 올리는 기계 장치였습니다. 위쪽에 4개, 아래쪽에 4개의 도르래를 연결한 복합 도르래 원리로, 이론상 8분의 1의 힘만으로도 무거운 물체를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녹로는 긴 장대 끝에 도르래를 매달아 돌을 높은 성벽 위로 들어 올리는 일종의 크레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첨단 장비들 덕분에 당초 10년으로 예상했던 공사 기간을 불과 2년 9개월 만에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 치성(雉城), 공심돈(空心墩), 포루(砲樓) 등 과학적 방어 시설: 화성의 방어 체계는 동양 성곽의 견고함과 서양 포대(砲臺)의 공격력을 결합한 혁신적인 시스템이었습니다.
- 치성: 성벽 일부를 바깥으로 돌출시켜, 성벽에 접근하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하여 사각지대를 없앤 시설입니다.
- 포루: 치성을 한 단계 발전시킨 형태로, 성벽 바깥으로 돌출된 벽돌 건물 내부에 화포를 설치하여 막강한 화력을 제공하는 일종의 포대입니다.
- 공심돈: 수원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가장 독창적인 시설로, 성벽 위에 속이 빈 3층짜리 망루를 세운 것입니다. 군사들이 내부에 몸을 숨긴 채 나선형 계단을 오르내리며 여러 높이의 총구와 포구를 통해 밖을 감시하고 공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1797년 화성을 방문한 정조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든 것이니 마음껏 구경하라”며 크게 만족했다고 전해집니다.
이처럼 수원 화성은 단순한 돌과 나무의 집합이 아니라, 실용을 중시한 실학 사상과 동서양을 아우르는 과학 기술, 그리고 백성을 아끼는 군주의 마음이 결합하여 탄생한 18세기 과학 혁명의 결정체였습니다.

정조의 꿈, ‘효(孝)와 이상(理想)’이 깃든 도시
수원 화성이 지닌 가치는 군사적, 건축적 측면을 넘어섭니다. 이 거대한 성곽 도시의 가장 깊은 곳에는 한 아들의 지극한 효심과 한 군주의 원대한 개혁의 꿈이 굳건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성은 정조라는 한 인간의 내면과 그의 시대를 담아낸 거대한 상징물인 것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지극한 효심의 발현
화성 건설의 출발점은 비운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애끓는 효심이었습니다. 당쟁에 휘말려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생을 마감한 사도세자. 어린 시절 아버지의 비극적인 죽음을 목격해야 했던 정조는 왕위에 오르자마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하며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자신의 필생 과업으로 삼았습니다.
그 첫걸음이 바로 아버지의 묘를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정조는 1789년, 양주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당대 최고의 명당으로 꼽히던 수원의 화산(華山)으로 이장하고, ‘현륭원(顯隆園, 훗날 융릉)’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묘를 참배하고 영원히 수호하기 위한 거점으로, 묘역 인근에 새로운 신도시와 성곽을 건설할 것을 명합니다.
이것이 바로 수원 화성의 시작이었습니다. 화성은 아버지의 넋을 기리고 지키려는 아들의 눈물겨운 효심이 빚어낸 결정체이자,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구시대의 정치와 단절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겠다는 정조의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개혁 군주 정조의 이상 도시 구현
수원 화성은 단순한 능의 수호 성곽을 넘어, 정조가 꿈꾸던 이상 국가의 축소판이었습니다. 그는 화성을 통해 낡은 질서를 허물고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백성이 풍요로운 새로운 조선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 새로운 경제 중심지: 정조는 화성이 한양과 삼남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라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이곳에 시장을 열고 상인들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여,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를 넘어 상공업이 발달하는 자급자족형 경제 도시로 육성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백성의 부를 통해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려 했던 그의 개혁 사상을 보여줍니다.
- 왕권 강화의 군사적 거점: 당시 수도 한양은 정조의 개혁에 반대하는 노론 벽파 세력의 영향력이 막강했습니다. 정조는 자신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의 핵심 병력을 화성에 주둔시켜, 기득권 세력의 간섭에서 벗어난 강력한 군사적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화성은 정조의 개혁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보루였던 것입니다.
- 개혁 정치의 상징: 결국 수원 화성은 정조의 모든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이상이 집약된 ‘계획 도시’였습니다. 아버지를 향한 효심을 명분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본질은 구시대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왕이 직접 백성과 소통하며 새로운 정치를 펼치고자 했던 개혁 군주의 원대한 포부가 담긴 공간이었습니다. 화성은 정조가 꿈꾼 새로운 세상의 청사진이었습니다.

시간을 초월한 가치: 수원 화성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수원 화성은 단순한 옛 성곽이 아닙니다. 이곳은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선 불굴의 유산이며, 18세기 조선이 도달했던 과학과 예술의 정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군주의 지극한 효심과 백성을 위한 위대한 꿈이 돌 하나하나에 아로새겨진 역사의 현장입니다.
우리는 수원 화성에서 파괴와 상실의 아픔을 이겨낸 ‘기록의 힘’을 봅니다. 『화성성역의궤』라는 위대한 기록이 없었다면, 화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우리에게 현재를 충실히 기록하고 보존하는 일이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임을 일깨워 줍니다.
또한 우리는 시대를 앞서간 선조들의 ‘지혜와 혁신’을 배웁니다.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동서양의 기술을 융합하고, 거중기와 같은 첨단 장비를 과감히 도입하여 불가능해 보였던 대역사를 성공시킨 그들의 실용 정신과 창의력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깊은 영감을 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버지의 넋을 위로하고 백성의 평안한 삶을 꿈꿨던 **’정조의 마음’**을 느낍니다. 한 사람의 진심 어린 꿈이 어떻게 시대를 움직이고 위대한 유산을 남길 수 있는지를 화성은 묵묵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수원 화성을 거닐며 성벽에 손을 얹어 보십시오. 그 차가운 돌의 감촉 속에서 우리는 파괴를 이겨낸 기록의 온기, 시대를 뛰어넘은 지혜의 맥박, 그리고 세상을 바꾸려 했던 한 위대한 군주의 뜨거운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수원 화성은 과거에 갇힌 유물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네는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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